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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남용 사진전 <구운몽(九雲夢)>에 부쳐

hyleidos 2024. 7. 16. 22:23

 

 

 

 

 

 

윤남용 사진전 <구운몽(九雲夢)>에 부쳐

  작가 윤남용을 처음 만난 것은 홍천에 있는 화가 이진경의 작업실에서였다. 오랫동안 네팔을, 중국을, 인도를, 그리고 거기서 우연히 만난 인도 사두(Sadhu)의 가르침을 좇아 떠돌다가, 다시 홀연히 눈 쌓인 강원도의 풍광에 매료되어 이곳에 스며들었다고 했다. 그를 처음 보았던 인상은 금방이라도 이 세상에서 이 한 몸 죽어 없어져 버리라고 버둥대는 듯한 사람의 그것이었다. 다 쓰러질 듯한 한옥을 빌려 그가 살던 방에는 이제껏 모아온 듯한 오래된 영화 DVD 케이스들이 마시던 술병과 함께 발디딜 틈 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마틴 스코세이지의 2010년도 영화 <셔터 아일랜드(Shetter Island)>에 관한, 당시의 나로서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그만의 해설을 들었다.
  서구 미술이 고도로 발달시켜 온 사실적 재현 기술의 총체라 할 사진의 발명 이후, 그것이 과연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담는 기계가 되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예술과 같은 것이 되어야 할 것인가라는 논쟁은 이제는 진부하다 느낄 정도의 반복된 것이다. 예를 들어 전례가 없는 세계적 단위의 전쟁이 일어나면서 함께 꽃 피어난 모더니즘 예술 속에서 사진은 한쪽의 극에는 앨버트 랭거 파취(Albert Renger Patzsch)로 대표되는 엄중한 신즉물주의가, 다른 한쪽의 극에 만 레이(Man Ray)로 잘 알려진 마치 우리가 매일 꾸는 꿈의 이미지 같은 초현실주의가 등장했다. 
  그런데 윤남용의 스트레이트 사진은 나에게 그것과는 결이 조금 다른 어떤 것을 느끼게 한다. 그가 찍은 사진은 일종의 ‘스트레이트 포토’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카메라 피사체에 대해 그 어떤 조작도, 연출도, 미장센도 없이 그저 렌즈에 맺힌 이미지의 있는 그대로를 필름에 담는 것.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사진을 보고 있자면 동시에 어떤 모종의 판타지같은 것이 느껴진다. 그건 왜일까? 
  어느 날 윤남용은 나에게 사진을 잘 찍는 눈을 훈련하기 위해 오랫동안 보고 있는 대상의 바깥으로 자신의 시야를 확장하는 연습을 해왔다고 말했다. 그렇게 되면 보는 이의 눈 앞에 나타난 대상에 대한 당장의 오롯한 집중은 자신의 시야 전체에 대한 객관적 관찰과 함께 한다. 나에게는 이 말이 묘하게도 불교에서 말하는 지관쌍운(止觀雙運), 정혜균등(定慧均等) 같은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하나의 대상에 집중해 생각을 멈추고(止) 고요함의 선정에 드는 것과 감관(感官)의 안과 밖에 나타난 경계로부터 멀리 떨어져 그것의 전체를 관찰하는 수행의 병행. 
  어느 화가의 작은 아틀리에에서 그림을 배우다가 사진을 하겠다고 결심한 19세 때 이후로부터, 그 누구에게도 사진을 배운 바 없다고 했다. 처음부터 대학은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그는 말 그대로의 순수한 사진술의 ‘독학자’이다. 하지만 오히려 이 때문에 그가 홀로 배워나간 사진은 제법실상(諸法實相)을 꿰뚫어 보기 위한 오래된 불교적 수행 전통이 전하는, 그러한 접근 태도 비슷한 것이 되지 않았을까도 생각해 본다.
  윤남용을 개인적으로 만난다면 기어코 아스라한 꿈처럼 살아온 그의 일생이, 그의 말을 통하지 않고도 그의 몸에 오롯이 새겨져 있음에 일단 놀랄 것이다. 마치 바람에 떠밀려 다니는 낙엽과 같이 바깥으로만 흘러들던 그의 행랑이 굳이 말이 없이도 그의 입술, 눈빛, 그의 제스처를 타고 바람처럼 흘러나온다. 그의 생애가 쌓아온, 어떤 식으로든 다른 이들은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그만의 감추어진 시간의 지층들. 결정적으로 그의 사진 역시 그의 그러한 모습을 닮아있다. 
  윤남용의 이번 개인전 전시 제목은 '구운몽'이다. 기본적으로 인생을 허망한 한바탕의 꿈과 같은 것으로 보는 불교적 세계관을 배경으로 한 소설 <구운몽>이 작가 서포 김만중이 그의 유배 시절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쓴 이야기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떠난 그의 방랑 행각이 일종의 스스로가 내린 삶으로부터의 유배였다면, 그의 사진은 누구를 위로하려는 것이었을까? 
  흔히 다게레오타입이라고 불리는 루이 다게르(Louis Daguerre)의 사진이 처음 등장했을 때 프랑스의 화가들은 “회화는 오늘부터 죽었다”고 탄식했다. 하지만 사진이 담는 진실과 회화가 보여주는 감각이 서로 다른 궤적을 그려왔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다. 완벽한 재현을 목표로 한 서구의 고전적 재현 미학은 필연적으로 기술의 발달과 함께였다.* 
  하지만 그러한 기술을 통해 우리는 그것이 분명 환영임을 알면서도 동시에 진실임을 주장하고 싶어하는 모호한 믿음 속에 놓이게 된다. 마치 한 편의 소설이나 연극, 드라마 등이 그렇듯이. 그런데 그것이 재현 미학의 매커니즘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닐 것이다. 가령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소설이라고도 명석판명한 철학서라고도 할 수 없는 굳이 구분하자면 어떤 우화(偶話)와 같은 글 속에서 니체는 “삶에 대해 깊게 사유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이 세계가 일종의 허구라는 것을 언뜻 직감한다”고 적어놓았다. 
  사진은 특유의 기술적 프로세스로 우리의 흘러가는 삶의 한순간을 전유해 우리 앞에 그것을 다시 전경화하여 보여준다. 사진이 가진 가장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것을 찍었음에도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어떤 새로운 삶을 상상하고 생성하게 만드는, 사진 이미지 자체가 가진 서사화의 잠재력에 있다. 그것은 대체로 우리의 의지를 벗어난다. 그렇게 본다면 사진이란 결국 우리가 매일같이 살아가는 삶이라는 무대 속의 또다른 무대, 혹은 꿈속에 꾸는 꿈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다게르의 직업이 본래 무대 미술가였으면서 극장 운영자였다는 것도 그렇게 본다면 단지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듯 사진은 우리의 삶을 무대로 만들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의 삶은 각별하고 극진히 대해야 하는 생활의 리얼리즘으로 인해 눈처럼 켜켜이, 그리고 엄중히 쌓여간다. 자신이 가진 삶에 대한 태도가 자연스럽게 배어나는 사진, 때문에 역으로 자신이 찍는 그 사진으로 인해, 사진으로부터 문득 자유로워지는 삶, 사진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것이리라. 조고각하(照顧脚下), 진실은 멀리에 있지 않다. 
  그가 강원도에 다시 정착하면서 찍었던 하얀 눈 속에 파묻혀 있던 하얀 진돗개 ‘깔리’의 사진을 나는 사랑한다. 언제 공부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어쩐지 개의 특성과 습성을 꿰고 있었다. 깔리와의 산책 속에서 개가 어떻게 사람과 다른지를 말하던 그가, 나에게 문득 “개가 곧 사람의 스승”이라고 말했을 때 그의 세상을 보는 눈이 가진 특별함을 느꼈다. 나는 이제 그가 더 이상 떠도는 것을 멈추고 강원도가 보여주는 아름다운 절경과 그의 눅진한 생활이 서로 녹아드는 그런 사진을 더 많이 보고 싶다. 그랬을 때 나는 그동안 피해왔던 그의 술주정이 담긴 전화를 기꺼이 받을 것이다. 그는 여전히 내가 좋아하는 사진작가니까.

글쓴이: 백규석 
Art and Technology 연구자, 광주교육대학교 출강


  *니엡스의 헬리오그라피에 이어 다게레오타입의 사진을 처음 발명한 루이 다게르(Louis Daguerre)는 본래 무대 미술 디자이너였다. 건축, 회화 등에 경력을 쌓아온 그가 자신의 재능을 인정받은 장소가 연극 무대였다는 점은 특히 주의를 요한다. 파리 오페라하우스 무대의 배경 그림으로 명성을 얻은 후, 다게르가 발명해 직접 운영하던 극장이 디오라마(diorama) 극장이다. 다게르의 디오라마는 본인이 그린 사실적 그림의 반투명 영사막에 그만이 알고 있는 현란한 조명 기술이 가해져, 보는 이로 하여금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생한 환상을 창조했다고 전해진다. 서구 미술이 역사적으로 발달시켜 온 사실적 리얼리즘이 그 극에 이르러 다시 판타지가 되고, 이러한 판타지가 곧 우리의 마음 속에서 새로운 현실감을 가진 극적 리얼리즘이 되는 세계. 파리 사람들로부터 큰 인기를 모았던 디오라마 극장이 불의의 사고로 불타고 나서 다게르가 발명한 사진은 그것의 연장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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